항일 애국투사 구파 백정기 의사 추모제가 지난 5일 백정기 의사 기념관 의열사에서 열렸다.
순국 제75주기를 맞아 열린 이날 추모식에는 유성엽 국회의원을 비롯 강 광시장 정도진 정읍시의회의장, 기념사업회 박기수 회장과 회원 등 35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진행됐다.
이번 행사는 추모제를 시작으로 전시관, 영상물 관람과 오후에는 어린이 백일장, 사생대회도 함께 열렸다.
백 의사는 1933년 중국 상해에서 일본 주중공사 아리요시아끼의 암살을 시도하다가 피체되어 1934년 6월 5일 일본 나가시키현 이사하야 형무소에서 순국한 항일애국투사.
1896년 1월 19일 부안읍 신운리에서 출생, 소년시절 현 영원면 은선리로 이주했고 1914년 일본경찰 폭행을 시작으로 항일애국활동에 나섰다.
이후 1919년 3.1운동을 계기로 직접행동을 결의하고, 동지를 모아 자금 모금 등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고, 1921년 일본에서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자)들과의 교류를 통해 독립운동노선을 택한 뒤 1924년 중국에서 결성된 ‘재중국조성무정부주의 연명’에 참여하고, 1928년 ‘동방무정부주의자연맹’의 일원으로 활동했다.
1930년 ‘한족총연합회’의 일원이 되는 등 아나키스트로서의 활동도 전개했고 1931년에는 ‘항일구국연맹’산하 비밀결사단체인 ‘흑색공포단’의 행동책임자로서 막중한 소임을 다했으며 일본 군수물자수송선과 천진 일본영사관에 폭탄을 투척하는 등 대일 결사항전에 돌입하게 된다.
특히 1933년 일본공사 아리요시아끼가 일본군 수뇌와 중국 친일 고관들을 모아 육삼정(六三亭)이라는 요리집에서 주연을 연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이를 타도하고 암살하고자 했던 ‘육삼정 의거’를 도모했다.
이 사건은 비록 실패에 그쳤지만 살신성인적인 희생으로 중국내의 항일세력이 연합전선을 구축하는 등 동아시아 판도내의 국제관계 변화를 가져오게 한 역사적 사건으로 평가되고 있다.
육삼정 의거의 실패로 일제에 붙잡힌 백 의사는 1933년 일본 나가사키재판소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복역하던 중 오랜 지병으로 인해 39살의 생을 마감하게 된다.
이후 조국광복 후 1946년 삼의사(윤봉길, 이봉창, 백정기)의 유골이 봉환되고 국민장을 거쳐 서울 효창공원에 안장됐고 1963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독립장에 추서됐다.
한편 정읍시에서는 이 같은 백 의사의 구국정신을 기리기 위해 1996년 (사)구파백정기의사기념사업회를 결성, 백정기의사기념관을 비롯한 백정기의사유적지 조성사업을 시작, 2004년 6월 5일 기념관을 개관하고, 현충시설로 지정했다.
시는 또 매년 6월 5일 이곳에서 추모제를 개최하는 등 백의사의 애국정신을 기려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