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각교(大脚橋)와 최숙빈(崔淑嬪)
2005-08-20 변재윤
대각교(大脚橋)와 최숙빈(崔淑嬪)
대각교(大脚橋)는 태인면 거산리(居山里)에 있는 다리다.
이 다리는 전주 감영에서 남도로 내려가는 교통의 요로였다. 이 길로 지나는 사람이 많았으나 다리가 없어 행인들이 불편을 겪고 있었다.
그런데 3백여년 전 태인골 백암리(現 칠보면 백암리)에 살던 자선가로 알려진 박잉걸(朴仍傑)이라는 사람이 자신의 사재(私財)를 털어 크고 튼튼한 돌다리를 놓았으니 이 다리를 대각교라 불렀다. 그 후 이 다리는 지나는 사람마다 그 분의 고마움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숙종(肅宗)때의 일이다.
둔촌(屯村) 민유중(閔維重)이 마침 영광 군수로 발령을 받고 부임하러 가는 도중, 이 다리에서 쉬어가게 되었다. 옆에는 이제 여덟 살 먹은 딸을 안은 둔촌의 부인도 동행하고 있었다.
마침 둔촌의 일행 앞을 지나가던 어린 소녀 거지가 있었다. 얼른 보아 옷은 남루하나 용모가 단아하고 총명하고 잘 생긴 소녀였다.
그런데 무슨 인연인지 이 소녀의 모습은 안고 있는 둔촌 부인의 딸 모습과 닮은 데가 너무 많았다. 지나는 소녀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고 둔촌 부인은 이름과 부모와 가정환경을 두루 물어 보았다.
성은 최씨(崔氏)요 부모님은 돌아가신지 오래고 무의무탁한 천애 고아였다. 둔촌 부인은 불쌍히 여겨 이 소녀를 데리고 갔다. 그 뒤 글공부와 예의범절을 가르치며 친딸과 똑같이 생각하며 길렀으니 예의 바르고 얼굴 곱고 재주 뛰어남이 이를 바 없었다.
수년 후 둔촌은 내직(內職)으로 승진되어 서울로 가게 되었을 때에도 이 소녀만은 같이 데리고 갔었다. 이 무렵 숙종대왕의 처음 부인이신 인경왕후(仁敬王后)가 승하하자 다시 현숙한 왕후 민씨(閔氏)를 선택하였으니 이 분이 바로 둔촌의 딸이었다.
그때까지도 민씨 왕후는 대각교에서 얻은 최씨를 옆에 두고 있었다. 얼마 후 숙종대왕께서는 장희빈(張禧嬪)이라는 아름다운 궁녀에 매혹되고 말았다. 장희빈은 대왕의 사랑을 독차지하게 되자 결국 민씨 왕후는 궁에서 쫓겨나게 되었다.
그런 일이 있은 후 최씨는 밤이나 낮이나 민씨 왕후 생각뿐이었다. 밤마다 삼경이 되면 민씨 왕후를 위하여 천지신명께 기도를 올렸다. 어느 날 밤에도 기도를 올리고 있었는데 때마침 암행(暗行)에 나섰던 숙종대왕이 발견하고 옛 주인을 사모하는 갸륵한 정성에 감탄하여 그를 자기 곁에 있게 하였다.
어느 사이 최씨는 처녀의 몸인데도 배가 불러가고 있었다. 얼마 후 장희빈이 이 눈치를 채고 말았으니 최씨에 대한 장희빈의 시새움과 구박은 시작되었다.
하루는 숙종대왕께서 낮잠을 주무시는데 꿈을 꾸었다. 꿈의 내용은 마당에 놓인 독 밑에서 용 한 마리가 내려오다가 빠져나오지 못하고 죽어가는 꿈이었다.
즉시 내전에 들어와 독을 열어보게 하니 장희빈의 혹독한 구타로 최씨가 숨이 막혀 죽어가고 있었다. 이를 목격한 숙종대왕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후 장희빈에게 사약을 내려 죽게 하고 인현(仁賢)왕후 민씨를 궁으로 모시게 되었다. 곧 최씨는 옥동자를 낳았으니 이 분이 뒷날의 영조(英祖)다. 바로 최씨는 상궁에서 숙빈(淑嬪)으로 승격되었다.
최숙빈은 고향인 태인현감에 명하여 친척을 조사하였으나 한 사람도 없었으며 그의 부모 묘까지도 찾을 길이 없었다. 최숙빈은 태인현 최사령(崔使令)의 딸이었다는 말이 있으나 자세히 알 길은 없다.
다만 숙종실록(肅宗實錄)에 의하면 '숙종 20년 9월 13일 영조를 낳았으며 숙종 44년(서기 1718년) 3월 9일 졸(卒)하니 장례로 우송(優送)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영조 4년 박필현(朴弼顯)으로 인한 난리가 일어났을 때 태인 현을 관대하게 보아 준 것은 영조의 어머니 고향이었기 때문이라고 전해진다.
최숙빈의 인연을 지닌 대각교는 근대에 와서 서울 목포간의 국도가 그 위쪽으로 나게 되어 폐교(廢橋)되고 말았다.
많은 세월이 흐른 지금, 최숙빈은 어디서 왔으며 누구의 딸이며 어떤 설움을 간직하고 영민했을까? 하는 의문을 던져두고 세월은 또 흐르고 있다.
인용: [정읍의 전설] 김동필
자료출처 : 정읍시홈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