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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속기획] 장구산-남고서원 - 칠보산 - ⑤, 中 편 일재 이항선생의 숨결 그대로 서원에 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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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속기획] 장구산-남고서원 - 칠보산 - ⑤, 中 편 일재 이항선생의 숨결 그대로 서원에 베어
  • 정읍시사
  • 승인 2005.07.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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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지 않아도, 밀려 올라오는 안개로 유명
▲ 보림리 두꺼비 바위
몰고개를 지나 전주~순천간 국도 1호선 확포장 도로를 밑으로 통과해 이르는 장명동 구량마을을 지나 신성리 삼거리에서 오른쪽으로 5백여m를 진행하면 장구산(藏龜山)에 이른다.

1999년 건립된 장구노인회관의 건립비문에 따르면 “옛 신라 헌강왕때 연기(烟起)란 사람의 유산가(遊山歌)에 ‘장구산하(藏龜山下)’라는 구(句)가 있어 이로 인해 동명(洞名)이 장구산이 된 것인데, 일제치하에서는 동명이 장구산(長久山)으로 불리었다.”고 마을 이름의 유래를 밝히고 있다.

마을 노인들은 그래서 장구산의 뒷산을 지명그대로 ‘장구산’이라 부르고, 장구산 마을과 구량마을 사이의 과거 정읍 시내로 통했던 산길을 ‘망구침’, 망구침이 위치한 산의 이름을 ‘자라등’이라 부르고 있다. 모두 칠보산 줄기에 놓여 있는 작은 봉우리들이다.

장구산을 지나치면 두 갈래 길이 나오며, 오른쪽으로는 탑성마을, 그리고 왼쪽으로는 노송마을에 이어 가정리로 닿는다.

가정리로 연결되는 도로의 얕은 언덕에서 ‘보림사 1.4km'를 알리는 팻말을 만난다.

대한불교 조계종단 소속으로 선운사 말사인 보림사는 현재 전통사찰 96호로 지정되어 있다. 대성리학자 일재 이항의 서당으로 쓰였다가 후일 사찰이 되었다는 일부 기록에 대해 보림사 관계자는 “본래 보림사의 전신은 보림암 이었으며 서기 864년(신라 경문왕 4년) 신라 구산선문의 하나인 개산조 도의국사의 법손(法孫)인 보조체징선사가 상족(上足 수제자)인 청환선사에게 명해 창건되었다”고 주장한다.

“그 후 쇠락의 길을 걷던 보림암은 조선 선조때 일재 이항 선생이 서당으로 잠시 사용했다가 지난 1989년 비구니 지성이 이 곳에 주지로 부임해 1992년 극락전과 삼성각을 헐고 대웅전을 건립하는 등 중창불사했다.”고 전한다. 비온 뒤 칠보산과 어울린 경치가 명불허전(名不虛傳)이다.

일재 이항선생이 서당을 열었다는 마을, 보림리(寶林里) 입점(笠店)마을은 칠보산 자락에 위치 갓점, 관동이라 불렸고 가정마을 남쪽에 있다.

조선 명종때 일재(一齋) 이항(李恒)선생이 태인골 분동(粉洞)으로 내려와 지금의 보림사가 있는 마을에 보림정사(精舍)를 짓고 강학(講學 학문을 가르침)을 했다는 마을로서 사액서원(賜額書院-임금이 현판 글씨를 내려주는 서원으로서 면세와 면역의 혜택이 있으며 노비와 전답, 책 등을 하사받는 특권을 누린다)인 남고서원이 있다.

「남고서원(南皐書院)-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76호. 1577년 창건. 호남의 대성리학자 일재 이항과 그의 제자 건재(建齋) 김천일(金千鎰-언양인으로 자는 사중(士重), 일재 문하에서 수업했으며 수원부사를 지내다 낙향했다. 임진왜란 당시 수원과 강화에서 창의(의병을 일의킴)했으며 진주 촉석루에서 전사했다)을 향사하고 있다.
대원군때 서원이 철폐되자 단(壇)을 만들어 제사를 지내오다 1899년 유림과 후손들의 발의로 강수재(講修齋)를 세우고 1927년에 중건하여 김점, 김복억, 김승적, 소산복 등을 추배하고 있다. 지방 학문의 도장으로 일재 이항선생의 문집과 그 목판을 소장하고 있으며 지금은 복분자 농사를 짓고 있는 이항 선생의 13대 본손 이태복씨가 서원을 관리 하고 있다.」

「이항(1499~1576)=조선중기의 문신으로 이기일원론(理氣一元論)을 주창했다. 서울서 출생했으며 무예에 능했다 한다. 28세에 백부의 영향으로 도봉산에서 학문을 닦았으며 송당 박 영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당대의 학자인 기대승, 김인후, 조식 등과 교유했다. 한창 공부 할 때는 앉은자리의 전후좌우에 칼을 꼽아 흐려질 수도 있는 정신을 경계했다고 한다. 1538년(중종 33) 태인 분동에 터전을 잡고 보림리에 들어 후진을 양성했다.」

선생 타계 후인 1577년(선조 10년) 유림들의 발의로 칠보산 아래에 사당이 세워졌으며 1685년(숙종 11년)에 남고(南皐)라는 사액이 내려졌다. 칠보산의 보림사 요사(寮舍)가 학문을 강(講)하던 일재서당으로 추정되며, 문집으로 일재집(一齋集)이 있다.

七寶山은 수청리와 정읍시내 사이에 있는 산으로 높이는 472m이다. 노령산맥의 주맥으로 이곳에서 한 가닥의 지맥이 동쪽으로 뻗어 성황산(옛 정읍현의 주산)을 이루었다. 동, 북, 서의 계곡이 수려해서 칠보림학(七寶林壑 칠보숲골)으로 유명하다. 제일 높은 봉우리는 연수봉으로, 정읍시가 세운 무인 산불감시탑이 세워져 있으며 분지 형태로 상당히 넓은 평지가 펼쳐져 있다.

칠보산 정상에 서면 정읍시내가 한 눈에 들어오며, 먼저 금붕동의 노인종합복지회관과 건립 중인 노인전문병원이 눈에 띤다.

동쪽줄기로 산행을 계속하면 수많은 봉우리와 줄기로서 몇 개의 리(里)를 거쳐 칠보면의 접경에 이른다. 과거 수청리와 정읍을 잇던 질마재 뒷산 정상(칠보산 줄기)에는 지난 2002년 ‘보림산악회’가 세운 산신제단(山神祭壇)이 등산객을 맞이한다.

그러나 울창한 산림과 가시덩굴 식물들로 인해 여름철에는 특히 등산이 쉽지 않다.

칠보면은 삼국시대-대시산군, 통일신라시대와 고려시대-태산군, 조선시대 초-태인군, 조선태종 이후-태인군 고현내로 불리다가 1914년에는 정읍군 칠보면으로, 그리고 1995년 이 후에는 정읍시 칠보면이 되었다.

<하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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