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치원의 무성서원 등 옛 학자와 학문의 고장으로 유명, 박잉걸의 걸치기

칠보산 보림리 일재 이항을 모시는 남고서원과 함께 무성서원(武城書院)은 최치원과 신잠, 정극인을 모시고 있어 유명하다.
사적 제66호로 원촌(院村)에 있으며 조선 성종때 현판을 내린 사액(賜額)서원이다. 문창후 최치원, 영천 신잠, 불우헌 정극인, 눌암 송세림, 묵제 정언충, 성제 김약묵, 명천 김관을 모시고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기와집 문루를 지나면 안쪽으로 강당인 명륜당이 세워져 있다.
강수재와 흥학재, 신문(神門)을 지나면 사우(祠宇)인 3칸의 태산사가 있고 최치원 선생 등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은 신라인으로서 12세에 중국 당나라로 유학을 가서 과거에 급제, 현위와 공봉을 지냈다. ‘황소의 난’때 도통순관의 벼슬에 올라지었던 ‘토황소 격문(討黃巢檄文)’으로 명문장가임을 중국에 떨쳤다. 29세에 귀국해 신라 헌강왕때 한림학사와 태산(칠보를 중심으로 한 4개면 지역, 조선 태종 9년(1409년) 신태인을 합해 태인현이 됨)군수로 8년 간 봉직했다.
태산군수 당시 최치원과 얽힌 유적으로는 요즘 연꽃단지로 유명한 태인의 피향정과 칠보면 시산리 유상대지(流觴臺址)가 전해온다.
최치원이 이임한 뒤 고을백성들은 그를 추모하여 생사당(生祠堂)을 세웠으며 이 생사당(태산사 泰山祠)이 무성서원이 되었다.
정극인의 호는 불우헌(不憂軒)이다. ‘세상을 잃어버리고 근심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1401년 조선 태종조에 태어나 1481년 성종까지 일곱 임금을 보며 관직에서 70세 정년을 맞았다.
이 후 1475년(성종 6년) 칠보면 시산리(당시 무성(武城))에 동중향음례(洞中鄕飮禮)를 만들어 마을주민들이 상호친목을 다져 다투는 일이 없도록 하는 미풍양속의 기준을 세우게 했으니 이것이 고현동향약(古縣洞鄕約)의 시초이다.
모은 박잉걸은 단기 4009년 정읍시 칠보면 원백암리에서 태어났다. 학식이 높고 성품이 어질어 많은 사람을 도왔다. 고을의 길을 닦고, 고을의 육방(이호예병형공)에게 사전(개인 땅)을 기증해 부패를 막았고 다리를 놓아 고을민들의 편리를 도모했다고 한다.
매년 춘궁기에 마을(망골) 아래 길 가에 막을 쳐놓고 옷과 신발을 걸쳐놓아 부랑아와 궁핍한 마을민들이 자유로이 활용토록 했으며 끼니때는 대문을 열고 식사를 대접했다고 한다.
그 길은 현재 도로 확장으로 없어졌지만 지명의 유래는 그대로 남아 현재도 이곳의 지명은 ‘걸치기’로 통한다. 현재 백암초등학교 옆에 세워진 기적비(紀蹟碑)가 박 공의 공덕을 전해주고 있다.
옛 박잉걸 선생이 살았던 집은 헐리고 그 자리에 만덕가든이 들어서 박 공의 자손들이 이 가든을 경영하고 있다.
박잉걸의 성장지로 알려진 원백(元白)마을은 흰바위가 마을 뒷산 곳곳에 있어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24방위에 맞춘 24개의 당산이 있었다고 하나 모두 없어지고 현재는 몇 개만이 남아 옛 이름을 전한다.
그 가운데 현재도 매년 초사흗날에 당산제를 지내고 있는 장소인 마을 앞 당산나무와 함께 서 있는 남근석(전라북도 민속자료 제13호)이 유명하며 이 남근석은 박잉걸이 세웠다고 전해진다.
칠보산으로 말미암아 뻗어나간 줄기들은 많다. 그 만큼 오르는 길도 많다. 시내 쪽으로부터 들어가는 검듸(급붕동)의 서편 봉우리인 옥녀봉 역시 칠보산 줄기로 이곳을 통해 올라가는 길이 등산길로는 가장 보편화 된 길이다.
장애인 자활공동체 시설인 나눔의집과 법인사 사이로 나 있는 길을 타고 옥녀탄금형이라고 명명된 명당지대를 지나 산 능선에 도착하면 왼쪽으로는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196호인 석불좌상을 모신 미륵사의 뒷산으로 오르는 길, 오른편으로는 칠보산으로 오르는 등산로이다. 산에 오르지 않고 곧장 질러가면 장명동 구량마을이다.
칠보산으로 오르는 길은 정상 부근을 제외하고는 완만한 굴곡의 연속이다. 산을 오르는 동안 왼편 즉 북면(北面)쪽으로는 임도와 수종갱신을 위한 나무갈이가 한창인 듯 숲이 군데군데 비어 한가롭다.
오른편으로는 언뜻언뜻 정읍 시가의 모습이 스친다.
정상에 도착하기 직전 비교적 평평한 20여평 크기의 분지와 만난다. 오른편으로 노인종합복지관이 보이고 내장산을 향해 곧게 뻗은 도로가 선명하다.
그 길을 지나 정상 밑으로는 아주 오랫동안 그 자리에 있었음직한 바위군들이 이끼와 나무들과 어울려 서 있다. 등산로 외에 양 쪽 모두 급경사면을 보이고 있어 추락이 주의된다.
무인 산불감시탑이 서 있는 정상은 갈대와 키가 작은 굴참나무 등으로 뒤덮인, 역시 분지형태를 띄고 있다.
정상에 도착하면, 특히 여름철엔 올라간 길을 되짚어 내려오는 것이 좋다.
반대편으로 하산을 결정하면 상당한 공(功)이 필요하다. 가슴까지 차오는 잡풀과 야생 산딸기 줄기, 자연 복분자 가시덩굴로 등산로를 구분하기가 쉽지 않다.
자연으로 돌아간, 가로 누운 나무들도 발길을 넘어뜨린다. 특히 일기가 불순할 때는 권하고 싶지 않다. 비라도 만나게 되면 피 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칠보산 정상에서 동쪽으로 뻗은 줄기를 타다보면 아래쪽에서 굼실굼실 올라오는 안개가 장관을 연출하는 장면을 보는 특혜도 누릴 수 있다.
그렇게 뻗은 칠보산 줄기는 시내쪽을 제외하고서도 북면의 신평리와 보림리, 칠보면의 백암, 무성, 시산, 반곡, 축현, 수청리에 걸쳐 장구한 몸을 걸치고 있다.
무성리의 수많은 선비문화 유적을 지나 수청저수지로 향하는 싸리재는 오히려 한가롭다는 느낌이다.
왼편으로는 노령의 줄기로 고당산과 국사봉, 감투봉 등이 첩첩으로 둘러서 있다.
수만동저수지보다 조금 늦은 1986년 축조된 수청저수지는 상류가 산림으로 오염원이 없어 깨끗함으로 유명하며 항상 풍부한 수량으로 오염 없는 민물고기를 제공하고 있다.
맑은 날, 호수 표면에 비치는 양 쪽 칠보산과 고당산의 그림자가 매력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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