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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우(俛宇) 곽종석(郭鍾錫)선생(1846. 6. 24 ~ 1919. 8.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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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우(俛宇) 곽종석(郭鍾錫)선생(1846. 6. 24 ~ 1919. 8. 24)
  • 정읍시사
  • 승인 2006.06.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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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보훈처 6월의 선정 독립운동가
국가보훈처는 광복회․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국권회복과 조국독립을 위해 헌신하신 곽종석 선생을 6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익산보훈처에 따르면 선생은 1846년 경남 산청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총명한 재주를 바탕으로 성리학을 수학해 탁월했다.

이어 영남의 대유학자이자 주리론의 대통을 이은 한주 이진상의 가르침을 받고 퇴계학을 계승하여 한말 유림을 대표하는 유학자 가운데 한 분으로 부상했다.

하지만 배타적이고 보수적인 전통 성리학자로만 머물지 않았다. 서양 철학과 과학을 이해하면서 만국공법, 즉 국제법에 의거하여 침략세력을 심판할 것을 주장하는 선진적인 사고와 인식을 겸비한 민족지성이기도 했다.

이를 바탕으로 1896년 각국 공사관에 ‘천하포고문’을 보내 갑오왜란 이후 명성황후 시해만행, 단발령 강요 등 일제의 침략만행을 맹렬히 규탄했다.

나아가 1905년 일제가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여 국권을 강탈하자 이에 대한 반대투쟁을 폈다. 매국적을 처단하고, 조약을 철회하며, 국제법에 의거하여 일본의 죄상을 전 세계에 널리 알릴 것 등을 주장하는 상소투쟁을 벌였다.

뿐만 아니라 1907년 국채보상운동이 전개되자 토지를 매각하여 의연금을 보내는 등 이에 적극 동참했다.

특히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영남 유림을 이끌고 호서유림과 연합하여 파리장서운동을 전개했다.

유림 대표로 독립청원서를 작성한 뒤, 상해로 김창숙을 파견하여 파리강화회의로 보내는 한편, 영어·불어·중국어 등으로 번역하여 각국 공사관 및 언론기관에 보냄으로써 한국민족의 자주의지와 독립결의를 국제사회에 널리 알린 것이다.

이로 인해 일경에 피체되었지만, 재판정에서 일본인 검사가 “독립이 반드시 이루어질지 알지 못하면서 연로한 사람으로 어찌 경거망동하였는가”라고 질책하자, “국민이 되어 국민된 의무를 하였는데 망동했다고 하느냐”고 일갈하였다. 나아가 징역 2년을 구형하자 “어찌 종신이라고 하지 않고 하필 2년이냐”고 불굴의 항일의지를 표출하기도 하였다.

결국, 2년형을 받고 대구형무소에 수감 중, 옥고로 인해 1919년 6월 22일 병보석으로 출옥했다.

하지만 병이 악화되어 같은 해 8월 24일, “군자는 마땅히 만세를 위해 계획을 세워야지 한 때를 위해 계획을 세워서는 안 된다”는 유훈을 남기고 74세를 일기로 서거하였다.

정부는 이러한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한편 이와 관련 독립기념관과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에서는 선생의 뜻과 공적을 기리기 위하여 별도의 전시실을 마련해 관련 자료와 사진을 6월 한 달간 전시하는 한편, 순국선열유족회에서도 이 달의 독립운동가 학술강연회를 개최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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