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 세 번째 민주도 건립 기려 민속사관으로
지역 원로들을 위주로 계(契)를 조직해 100년 넘게 맥을 이어온 노인회 모임이 있어 화제다.
1905년 전북 정읍시 시기동에 군자정(君子亭)이란 이름으로 세워진 건물에서 노인들간 친목을 도모하는 것은 물론 국사(國史)에까지 참여한 ‘정읍노휴재(老休齋)’가 바로 그것이다.
올해로 102년째 된 고택은 아직도 성성하고 2005년 창건 100주년을 맞아 옆 창고를 리모델링해 노휴재 보존품 등 회원들의 활동상이 고스란히 남겨져 있어 당국이 본 시설에 대한 역사적 가치를 살려야한다는 의견이 일고 있다.
특히 항일운동을 시작으로 동학과 3.1운동에 이르기까지 노휴재 회원들이 참여했던 애국활동상을 한눈에 볼 수 있어 100년 전 참여정치를 펼쳤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두고 있다.
노휴재는 정읍 시기동에 3300여㎡(당시 1000여평)의 부지에 군자정이란 건물을 세우면서 당시 이계풍, 이익겸 외 11명의 발기인들이 모임을 결성한 것이 시초로, 특히 전국에서 세 번째로 민간인 주도로 세워졌다는 것에 의미가 깊다.
당시 노휴재는 활터가 있어서 이곳에서 활도 쏘고 심신을 수련하면서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던 곳으로 단순한 양로원이나 노인정 이상의 역할을 해온 것으로 전해진다.
1910년 한일합방을 거치면서 노휴재 회원인 이익겸, 박환규씨가 1919년 3.1운동때 독립선언문과 태극기를 준비하는 등 주동적 역할을 한 이유로 체포되면서 시련기를 겪기도 했다.
이익겸, 박환규의 이 같은 애국적 활동은 한참 뒤인 1990년 8월 정부로부터 건국훈장애족장을 서훈 받았고, 유해는 대전국립묘지 지사묘역에 안장돼 비로소 애국지사의 자리에 오르게 됐고 이후 지역 후손들의 정신적 지주로서 해왔다.
하지만 3.1운동으로 노휴재는 양사재(養士齋)로 이름이 바뀌었고 같은 해 11월 노휴재가 분리돼 반쪽 신세에서 한때 청년회관으로 개칭되면서 존폐 위기를 맞았다.
이들 애국지사의 활동이 말해주듯 일제강점도 이들의 애국활동은 굽히지 못했다. 노휴재 회원으로 애국활동을 한 원로들은 이뿐 아니다.
상해임시정부 지방조직책으로 활약한 류만규씨를 비롯, 노휴재 맥을 이어온 공로자로 이병규, 박석규 등이 있다.
류만규는 3.1운동 이듬해인 1920년 임시정부 국내조직때 국내 행정기관의 하나인 흥덕관장에 임명됐고 1921년 4월 독립공채 사건으로 선원이 돼 1년여 옥고를 치르고 석방됐다. 류만규는 1990년 건국훈장애족장을 추서 받았다.
또 1946년 정읍노휴재에 을유노인회를 결성해 자주의식을 높였던 이병규와 박석규는 1948년 노휴재 건물을 보수하면서 이때부터 정읍노휴재로 부르던 것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들은 정읍노휴재의 기반을 닦은 장본인으로서 그들의 의미를 되새기며 자자손손 유공인물로 인정받고 있다.
정읍노휴재의 이 같은 사회적 공헌과 원로로서 활약이 컸던 만큼 그들 자산을 원형 그대로 보존해 놓아 그들의 정신이 도도히 흐르고 있음을 느끼게 한다.
심지어 100년 동안 임시총회와 정기총회 등 모임 때마다 작성한 회계장부와 헌금 내역이 생생히 기록돼 있어 문화유산으로도 큰 가치를 갖고 있다.
또한 모임의 대표 격인 재장(齋長)이 30대를 이어오고 있으며 이들의 임기는 2년을 엄격히 적용해 왔던 것을 보면 솔선해 규약에 충실했던 것을 반증해 준다.
여기에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없는 규약인 회칙을 구체적으로 마련한 것과 노휴재기(旗)와 고향의 봄 곡에 가사를 붙인 ‘노휴재 찬갗까지 만들어 애창한 것은 이들의 자긍심으로 작용한 것으로 풀이된다.
아울러 노휴재 100년을 집대성한 ‘井邑老休齋 100年史’를 2005년 발간해 선배 회원들의 발자취를 후손들에게 역사의 길잡이로 소개하고 있다.
2003년 재장에 올라 3선 재장인 이금종 회장은 “노휴재는 백년의 전통을 이어온 노인휴식의 전당이지만 양로당으로서 계승 발전한 현대적 모델”이라며 “지역사회의 교화와 청소년 선도에 힘쓴 사회의 기둥역할을 꿋꿋이 해왔다고 자부한다”고 밝혔다.
이 회장은 또 “정읍 관내에 500여 양로당이 있지만 나라를 걱정하고 지역사회에서 리더십을 발휘했던 선배 회원들의 발자취는 현대사회 노인문제의 시금석”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