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은 넓은 땅 만큼이나 많은 매력을 가지고 있는 곳, 이번에는 중국 역사의 숨결이 묻어 있는 곡부(曲阜) 태산(泰山) 서안(西安) 낙양(落陽) 성도(成都) 등 역사의 도시와 새롭게 각광 받고 있는 관광지 구채구(九寨溝) 황룡(黃龍) 비경 그리고 전 세계의 지대한 관심 속에 공사 중인 양자강(長江) 3협 댐까지 둘러보며 24일간의 배낭여행 이야기이다.<전문>
지난 11월 13일 저녁 8시10분 출발지 인천항에서 떠난 배(향설란)가 중국 연대(煙臺)로 향해 서서히 움직인다. 다음날 11시 연대에 도착 후 배에 내려 북평항 시외버스터미널로 옮겨 오후 1시 출발하는 제남행 버스에 오르면서 배낭여행은 시작됐다.
고속도로에 들어서니 격세지감이 느껴졌다. 2년 전에 왔을 때보다 지금은 시설들이 잘 갖춰져 있고 차들도 바삐 움직인다.
산동성의 성도인 제남은 황하 하류 남쪽에 위치한 인구 335만의 중공업 도시로 춘추전국 시대에는 제 나라 노나라의 도읍지였고 공자 맹자의 활동 무대이기도 하였다. 제남은 예나 지금이나 교통의 요지로서 주변관광지 곡부. 태산으로 이동하기가 편한 곳이다
공자의 고향 곡부(曲阜)
다음날 승용차로 한 시간 만에 곡부에 들어서니 공자의 고향을 알려 주듯이 제일 먼저 공자와 제자가 말을 타고 각 나라를 돌아다녔던 커다란 조형물이 눈에 띈다.
먼저 삼공(三孔)인 공묘(孔廟). 공부(孔府). 공림(孔林)을 찾아 나섰다. 삼공의 주인공인 공자는 춘추시대 말기에 태어나 어린 나이에 아버지가 별세하여 빈곤하게 자랐다. 어릴 때부터 공부에 힘쓰고 특히 노나라 창시자 주공(周公)의 사상을 따른 전통적 문화 습득에 힘썼다 처음에는 노나라 하급관리로 시작 40대 말에 중도(中都)의 장관으로 발탁 됐다.
이어 노나라 재판관이며 최고의 직위가 되여 정치가의 능력을 발휘하였다. 그의 정치적 계획은 공실(公室)의 권력을 회복하고 평소 흠모하던 주공의 정신을 살린 질서 있는 문화국가를 건설하였지만 개혁은 실패. 56세에 실각하여 노나라를 떠나게 된다.
그 후 공자는 14년 동안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면서 자신의 정치적 사상을 펼칠 꿈을 안고 유세(遊說)를 계속하였다. 이런 과정에서 많은 제자들을 얻었으나 이상 국가 건설의 꿈은 실현될 수 없음을 깨닫고 68세에 노나라에 돌아와 중국사상 최초 사숙(私塾)을 열어 제자 육성에 전념 하다 74세에 생을 마감하게 된 것이다.
중국 제2의 고전 건축물 공묘 대성전
공묘를 먼저 둘러보았다. 공묘는 공자의 무덤이 아니라 공자를 모셔놓은 사당으로 BC 478년에 노나라에서 공자 사후 1년 후에 세운 곳이다. 그 후 역대 황제가 계속 보수 확장하여 현재 규모로 현존하고 있는데 세계적으로 한 인물을 위한 건축물 중 가장 오래되고 규모가 큰 건축물로 평가 받고 있다.
남북 길이가 약 1km나 되고 건물 안에 있는 방의 수가 466개나 된다. 본전인 대성전은 28개의 돌기둥으로 되어 있다. 정면 10개의 기둥에는 각 기둥마다 2마리의 용이 조각 되여 아름다움을 더 해 준다. 북경고궁의 태화전에 이은 중국 제2의 고전 건축물로 사랑을 받고 있다.
대성전 안에는 중앙에 공자의 초상화가 안치 되어 있고 좌우에 중삼과 맹자, 안휘와 자사 등 4명의 수제자들이 공자를 보좌하듯 늘어서 있다. 공 씨들의 저택 공부도 눈에 들어왔다. 공부는 공자들의 후손들이 대대로 살았던 저택이자 관공서이다.
송나라 인종황제가 공자 46대손 공종원(孔宗原)에게 자손 대대로 물려줄 수 있는 벼슬인 연성공(衍聖公)에 봉하고 이후부터 곡부 지역을 다스리게 하였으며 명대(明代)에도 다시 황제의 명에 의해 연성공부(衍聖孔府)로 봉해진 후 凊나라 시대에도 증축이 계속 되여 현재는 방만 463개인 광대하고 화려한 건물로 꾸며져 있다.
이는 그 만큼 공자가 국가적인 예우를 받았음을 한 눈으로 느낄 수 있는 부분이었다. 공 씨들의 가족묘 공림은 경건하기 이를 데 없었다. 공림은 공자와 그 자손들이 묘가 있는 곳으로 세계에서 제일 오래되고 가장 규모가 큰 가족묘이다.
안쪽의 공자묘에는 두개의 비석이 서 있다. 뒤에 작은 비석은 1244년 공자의 50대 후손인 공원(孔元)이 먼저 세웠다. 그 뒤 대성지성문선왕묘(大成至聖文宣王廟)이라고 새겨진 큰 비석은 그 후 1413년 서예가 황양정이 쓴 것이다.
공자의 묘 왼쪽에 있는 작은 건물은 공자의 제자 자공이 공자 사후 6년 동안 묘를 지키며 지냈던 곳이다. 스승에 대한 제자의 정성이 지극함을 알리려고 아담하게 만든 건물이지만 관광객들의 눈길을 끌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공자묘 옆에 아들 공리(孔鯉)묘가 있고 그곳을 지나면 바로 손자 공사(孔思)묘도 볼 수 있다. 부근에는 수백 년 된 고목이 어우러져 있어 공자의 성스러움과 경건한 분위기가 잘 조화롭게 느껴졌다.
68세에 낙향 중국 최초 사숙을 연 공자
공자는 68세에 낙향 돌아가실 때 까지 후진양성에 힘써 온 깊은 뜻, 즉 그의 언행이나 사상은 논어를 통해 전해지고 있다. 논어는 제자나 제자의 제자들이 기록한 것이지 공자가 직접 저술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뒤 공자의 사상(논어)은 중국 정치사에 미친 영향은 절대적이다. 또 중국뿐만 아니라 우리나라를 비롯한 이웃나라도 막대한 영향을 끼치면서 오늘을 살아가고 있다.
공자가 낙향할 당시 나이를 가진 우리 일행은 젊은 시절 열심히 살았지만, ‘이제부터 시작이다’는 마음으로 재충전의 기회가 되였으면 하는 바람을 새겨본다.
태산이 높다 하되 하늘 아래 뫼이더라 태산(泰山)
중국에는 오악(五岳)명산이 있는데 동악은 태산(泰山)이며 서악은 성서성 화산(華山), 중악은 하남성 숭산(崇山), 남악은 호남성 형산(衡山), 북악은 산서성 황산(黃山)이다.
그 중 에서도 태산은 오악독존(五嶽獨尊)이라는 명성을 얻고 있지만 그와는 달리 태산 주봉인 천주봉은 해발1545m로 그렇게 높은 산은 아니나 산동성의 평원지대 한 복판에 불쑥 솟아 있기에 높게 보이는 산이다.
정상으로 올라가는 길은 오직 하나인 9km 등산로에 깔아 놓은 7412개의 돌계단을 거쳐 올라 갈 수도 있고 두 군데 중천문과 도화원에서 출발하는 케이블카로 올라갈 수 있다.
태산에 올라서니 어릴 때 암기하였던 ‘태산이 높다 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리 없건마는 사람이 제 아니 오르고 뫼만 높다 하더라’ 양사언 시조가 떠오른다.
역대황제 72명의 숨결이 묻힌 태산에 오르는 벅찬 감정은 표현할 길이 없다. 역사적으로는 진시황이 처음 하늘과 땅에 태평성대를 이룰 것을 다짐하며 봉선의식을 거행한 산이다.
그 후 중국 역대황제 72명이 태산에 올라 일반 백성들도 태산을 신령스런 산으로 생각하고 태산에 한 번 오르면 10년을 더 장수한다고 하여 누구나 태산을 오르는 것을 숙원처럼 생각 한다고 한다.
남천문에 들어서면 하늘의 거리 천가(天街)가 나오며 이를 지나면 급경사 돌계단이 나오는데 그 위에 송나라 때 창건한 고색창연한 벽하사(碧霞祠)가 나온다. 벽하사 바로 위 바위에 황제들이 많은 글을 남겨져 있으나 유독 한나라 무제는 글을 새기지 않은 석비가 정상인 옥황전(玉皇頂) 바로 밑에 홀로 서있다.
이유는 이곳에서의 전망이 하도 아름다워 글로 다 표현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설과 치적이 많아 글로 다 적을 수 없어 무명비를 남겼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옥황정에 오르니 마당에 돌로 만든 조그마한 비석에 극정(極頂)이란 글자와 그 밑에 1,545m라고 쓰여진 것은 최정상임을 알려 주고 있다.
그 비석을 주변에는 수 백 개의 자물쇠가 혼란스러울 정도 걸려 있다. 그 의미는 서로 약속을 끊지 말고 영원이 묶어 두자는 뜻이라고 한다. 정상에 올라서나 날씨가 화창하여 눈 아래로 산동성을 볼 수 있는 행운을 얻기도 했다.
다음호 계속>
필자약력
김정일 (金正一) 전 정보통신부 홍보담당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