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익철(玄益哲)선생(1886~1938. 5. 7)
국가보훈처가 광복회.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국권회복과 조국독립을 위해 헌신하신 현익철 선생을 9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고 밝혔다.익산보훈지청에 따르면 선생은 평안북도 박천에서 태어나 자세한 성장과정은 드러나지 않지만, 경술국치 직후인 1911년 압록강을 건너 서간도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모색했다.
하지만 여의치 않자 귀국하여 1912년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일본은행권을 위조하려다 피체되어 6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1918년 다시 중국 서간도로 망명한 선생은 흥동학교 교사로 민족교육에 힘썼다. 그러던 중 3.1운동이 일어나자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투신, 서간도 한인동포들의 자치기관이자 독립운동 조직인 한족회에 가입하고 임시정부가 서간도에 설치한 군정기관인 서로군정서에도 참여하여 대일투쟁을 전개했다.
1920년에는 광한단을 조직하여 독립군 활동을 펴면서 국내로 잠입하여 군자금 모집 작전을 수행하다가 일경에 잡혀 3년의 옥고를 치렀다.
선생은 출옥 후 다시 서간도로 망명하여 1924년 남만주지역 독립운동 통합 조직인 대한통의부의 외무위원장, 1925년 정의부 중앙집행위원 겸 재무부장, 1929년 국민부 중앙집행위원장으로 활동했다.
이후 1931년에는 조선혁명당 중앙집행위원장과 그 산하 군대인 조선혁명군 총사령으로 무장투쟁을 전개하다가 또 다시 일경에 잡혀 7년형의 옥고를 치렀다.
그럼에도 1936년 말 일경의 감시를 피해 중국 상해로 또 다시 망명한 뒤 임시정부와 함께 남경, 장사로 이동하면서 조선혁명당을 재건하여 그 대표로 항일민족역량의 통일을 위해 애쓰고, 앞장서 독립운동 정당 통일운동을 전개하다가 1938년 5월 7일 불의의 총격으로 순국했다.
이에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또 이와 관련 독립기념관과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에서는 선생의 뜻과 공적을 기리기 위해 별도의 전시실을 마련, 관련 자료와 사진을 9월 한 달간 전시하는 한편 순국선열유족회에서도 이 달의 독립운동가 학술강연회를 개최할 계획이다.
저작권자 © 정읍시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