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읍시사] 전북서부보훈지청이 국가보훈처에서 1월의 독립운동가에 이소응 선생과 6.25 전쟁 호국영웅에 이기협 공군 대령을 선정했다고 밝혔다.
이소응 선생은 1852년 강원도 춘천 출신으로 1872년 22세 때 화서 이항로의 제자인 유중교의 문하에 들어가 일생을 화서학파 선배인 의암 유인석과 항일투쟁에 매진했다.
조선이 1876년 일제에 의해 강제로 개항되자 면암 최익현 등 화서학파 유생들과 반대 상소를 올려 일제의 침략성을 규탄했다.
1895년 명성황후 시해사건과 단발령을 계기로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나자 선생은 유인석의 권유로 의병대열에 동참해 1896년 춘천의병장에 추대됐다.
춘천의병은 관찰사로 부임한 친일관료를 처단하고 서울로 진격하고자 했으나 경기도 가평에서 패전해 퇴각하고 말았다. 이후 선생은 제천 유인석 의진에 입진하고 이들과 함께 1898년 서간도로 망명했다.
망명지에서 항일의지를 다지던 선생은 1900년 의화단 난을 계기로 유인석과 함께 귀국한 뒤 후학양성과 제천의 자양영당(紫陽影堂) 건립활동을 펼쳤다. 그러나 경술국치 후 일제의 핍박이 극심해지자 1911년 서간도로 다시 망명했다.
철저하게 수의(守義)생활을 고수하던 선생은 심양 외각 강평현(康平縣)에서 79세의 일기로 타계했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또 6.25전쟁 영웅 이기협은 1948년 9월 조국 창공에 대한 기상과 열정을 품고 항공병 2기생으로 입대했다.
6.25전쟁 발발 직후인 6월 28일 당시 이등상사였던 이기협은 미 군사고문단의 L-5연락기 2대가 여의도기지에 방치돼 있다는 보고를 받는다. 이에 전시에 아군기 한 대라고 더 보존해야 한다는 절체절명의 위기의식 하에 적 대공포의 위협을 무릅쓰며 수원기지에 연락기를 무사히 안착시키는 전공을 세운다.
여기서부터 리더십을 인정받은 그는 1950년 9월 공군소위로 임관했다. 이후 F-51전투기조종사 전환교육을 받고 강릉 제10전투비행단에 배속돼 지리산 공비토벌을 위한 1951년 8월의 항공지원 작전, 1952년 1월 승호리 철교파괴 작전 등에 편대원으로 참가했다.
승호리 철교는 적 후방 보급로의 요충지로서 반드시 파괴해야 하는 곳이라 저공비행의 극한 위험을 감수하면서 목숨을 걸고 임무를 완수했다.
같은해 3월 북한의 전쟁잠재력을 해체하기 위한 송림공업도시 폭격, 8월 평양 대폭격, 송림제철소 폭격작전 등 6.25전사에 빛나는 주요전투를 모두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이기협은 6.25전쟁 중 그칠 줄 모르는 사명감으로 F-51전투기 총 144회, 경항공기 100여회의 출격을 통해 적 전방 증원 차단, 핵심시설 파괴, 후방보급로 차단 등 어느 누구보다 큰 전공을 세웠다.
1955년 4월 이기협은 미국에서 제트전투기 조종교육을 받던 중 안타깝게 사고로 순직했다.